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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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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초지진
작성자 한종탁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07-10-13 10: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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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213

이곳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고종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로즈)극동함대 및 고종 8년(1866)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로저스)아세아 함대, 고종 12년(1875) 8월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이다.

당시 프랑스와 미국, 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해 우리 군은 사거리도 짧고 정조준도 안되는 열세한 무기로 외세에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특히 일본군함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에 강압에 의한 강화도 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를 맺어 인천, 원산, 부산항을 개항하게 되고 또한 우리 나라의 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이 진에는 병마첨절제사 1인, 군관11인, 군사 320인, 전선 3척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다.

- 이곳은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으로 애국애족 및 호국정신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1973년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전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방유적으로서의 초지진

강화의 동남단 길상면 초지리에 위치하고 사적 제 22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김포군 대명리와 마주 보이는 곳이다.

300년전 1656년 진이 설치되고 1679년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이 축조되어 이진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6문의 포가 설치된 황산포대와 12문의 포가 설치된 진남포대가 있었다. 진장으로 1666년에는 병마만호가 있다가 1763년에는 첨사가 있었고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에 배가 3척 배치되어 있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일본 군함 운양호 침공등 근세까지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이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시아 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할 때 4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덕진 광성의 제진을 공략하였다.

1875년 8월 21일 일본 군함 운양호가 초지진 포대와 격렬한 포격전을 벌여 싸운 강화도 조약의 시효진이다. 성축과 홀로남은 노송에는 당시의 포탄자국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 함대에 맹포격을 가했던 대포 일문이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당시의 격전지인 길상면 초지진에 옛 모습 그대로 옮겨져 사학가는 물론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 대포는 길이 2.32m 입지름 40cm의 거포로 일정때 일본 모 고관이 뜯어다 자기 별장에 기둥 밑받침으로 쓴 것을 해방 직후 고 장택상씨가 소장한 것으로 장씨의 현관 기둥으로 보관하다가 그의 아들이 초지진 복원소식을 듣고 기증한 것으로 오늘까지 남게된 유서깊은 유물이다. 1644년 유수 홍중보가 창설한 곳이다. 1666년 현종 때 유수 서필원이 병마 만호로 수직할 것을 상주 하였더니 1763년 영조대에 와서 유수 정실 이 첨사 겸 감목관을 보내 수직하게 하였다. 배치인원은 병마첨절제사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 목자 210명, 군량미 106석, 첨향미 103석, 간장 6독, 군기와 군용품 약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찾아가기:초지대교 -> 초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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